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화도 회군 (문단 편집) ===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 === 이러한 상황에서 명나라는 1387년 12월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는 한편, 고려의 사신을 입국시키지 말도록 함으로써 고려 조정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 사실 이미 1387년 무렵부터 고려의 지도층은 명나라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요동에서 어떤 사람이 고려로 도망쳐 와, >'명나라의 황제가 장차 처녀와 수재(秀才) 및 환관 각 1,000명과 소와 말 각 1,000마리를 요구할 것이다.' 라고 도당(都堂)에 제보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도당에서 우려하자, [[최영]]은 >'''"이런 식으로 한다면 군사를 일으켜서 명나라를 쳐야 한다."''' 고 주장했다. 즉 제2차 요동 정벌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었던 철령위 요구가 일어나기 전에도, 최영 등은 '''명나라를 칠 수도 있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피력하며 극도의 반명 기조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다음해인 1388년, 최영은 이성계의 협력을 바탕으로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을 제거했고('''[[무진피화]]'''), 이 과정에서 우왕과 긴밀히 연결된 최영의 권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고려 우왕 대(1374년 ~ 1388년) 정치 세력의 연구>, 강지원] 따라서 공공연히 명나라 공격을 말했던 최영의 의도는 고려의 국가 정책에 긴밀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반명 기조가 한층 올라왔던 상황에서, 같은 해 2월에 앞서 명나라에 건너갔던 외교관 설장수(偰長壽)가 돌아와 명나라 황제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는 고려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고려에서 짐의 지시를 따르겠노라고 스스로 원하기에 짐은 해마다 말을 바치라고 지시했으나 바친 말들은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공납의 어려움을 하소연하기에 내가 바치지 말게 하고 다만 3년에 종마(種馬) 50필만을 바치게 하였더니 바친 말이 또한 쓰기에 적당하지 못했다. 뒤에 사서 바친 5,000필도 모두 작고 약해져서 우리 말 한 필의 값으로 그런 말 두세 필을 넉넉히 살 만한 정도였다. > >지금 또 복색을 개정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면서 바친 것도 발굽이 제멋대로 생긴 데다 다리에 종기까지 났으니 기왕 바칠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따위를 바쳤는지 알 수 없다. 이는 필시 사신이 오는 길에 서경(西京)에서 원래 말을 팔아버리고 나쁜 말로 바꾸어 온 것이 틀림없기에 장자온(張子溫)을 금의위(錦衣衛)에 여러 해 동안 수감하는 벌을 내린 것이다. 그대가 귀국하거든 이 사실을 정무를 맡고 있는 대신에게 알리도록 하라. > >짐이 이미 통상(通商)을 허락했는데도 고려에서는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내 무역을 하려 하지 않고 몰래 사람을 태창(太倉)으로 보내 우리의 군사 태세와 전함 건조 여부를 정탐하게 했으며 또 우리 명나라 사람으로 그곳에 가서 정보를 누설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길거리에 노는 어린아이의 짓거리니 지금부터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지며 또한 사신도 보내지 말라. > >'''철령(鐵嶺) 이북 지역은 애당초 원나라에 속했으니 함께 요동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 기타 개원로(開元路)[* 지금의 중국 지린성과 랴오닝성 동남부 지역]·심양(瀋陽)[*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선양]·신주(信州)[* 지금의 중국 장시성 상라오시] 등지의 군민(軍民)은 다시 생업에 종사할 것을 허락한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고려사]]》 우왕 14년 [[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limit=20&page=1&pre_page=1&codeIds=PERIOD-0-3&searchTermImages=철령+이북&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철령+이북&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Detail/kr/kr_137r_0010_0020_0070/12/10/12/r|#]]}}} 이 당시 명나라의 요구 조건을 간략하게 살펴 보자면, * '''① 고려에서 보낸 말은 모두 약소하여 쓸모가 없다는 점''' * '''② 고려에서는 가만히 사람을 보내 명나라를 정탐하고 회유하였는데 이러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 * '''③ 철령 이북은 본래 원나라에 속한 땅이었으니, 이것을 모두 요동에 포함시켜 명나라의 땅으로 해야 한다는 점''' 바로 이 세 가지가 요구 조건이었는데, 게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사항의 경우에는 늘쌍있는 험악한 분위기의 대립과 트집이므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으나, '''세 번째인 철령위 요구가 문제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oi65.tinypic.com/52gp52.jpg|width=100%]]}}} || || {{{#000000 ▲철령위 위치 }}} || 철령위 지역은 함경도 원산만 부근으로 비정되는데,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명나라가 주장한 것은 고려에게 있어선 일전에 회복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을 회수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쌍성총관부 지역이 고려의 영역이 된 이후 벌써 23년이 지났으며, 이는 명나라의 건국보다도 2년 더 앞선 시점이었다. 때문에 고려로서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왜 홍무제는 이 시점에서 철령위 설치, 즉 국가 간의 가장 민감한 영토에 대한 분쟁을 초래했을까? 앞서 말한대로 홍무제는 북원과 고려 간의 연결 가능성에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고, 나하추를 굴복시킨 후에는 고려가 다시는 몽골의 잔여 세력과 손을 잡지 못하게 하고, 고려가 여진 세력을 포섭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즉 홍무제의 핵심은 사실은 고려의 영토가 아니라, 북원 세력의 차단이었다는 것이다.[* <철령위 설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 박원호] 이를 뒷받침하듯 '''위화도 회군 이후로 명나라는 두 번 다시 철령위에 대한 언급을 꺼내지 않는다.''' 즉 명나라가 철령위 이야기를 꺼낸 목적이 철령위 문제를 통해 일부러 고려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여기서 강경한 반응을 보이는 반명파와 온건한 반응을 보이는 친명파를 구분해내려고 했던 것인데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반명파가 제거됨으로서 굳이 고려를 더 자극할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홍무제가 고려의 땅이 탐나서 그런 요구를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홍무제는 여러 차례 고려에 대한 군사 원정의 무익함에 대해서 말한 바가 있었다.[* <철령위 설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 박원호]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농경민족인 한족이 중원을 통일하면 정복 전쟁보다는 수성을 위한 전쟁이었고,[* 한족 통일 왕조가 일으킨 한반도 정복전쟁은 후한과 고조선의 전쟁,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와의 전쟁이었다. 그 두 전쟁도 쉽게 이기지 못해 수나라는 망했고 당나라 역사상 최고의 황제 이세민도 여러차례 가로막혔다. 나당 전쟁 이후 당나라는 중간의 발해 존재 덕에 한반도를 넘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발해에 대한 정복전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송나라는 유목민족의 샌드백이었고] 이민족이 중원을 통일하면 정복 전쟁을 주로 일으켰다. 홍무제도 그 선상에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영토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거나 혹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당면한 문제인 북원 세력의 절멸보다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고려가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고심하고 있을 때, 몽골에서는 남옥이 이끄는 15만 군대가 북원의 본거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목적이 고려의 영토이던, 북원 세력에 대한 통제이던 간에 영토를 둘러싼 분쟁은 고려 조정에 있어 큰 화두가 될 수 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